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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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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8세는 1223년부터 1226년까지 프랑스 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필리프 2세의 아들로, 왕자 시절 잉글랜드 침공을 시도하고 제1차 바론 전쟁에 참여했다. 1217년 잉글랜드에서 돌아온 후 알비 십자군을 지원했으며,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푸아투를 점령하고, 알비 십자군을 이끌어 남프랑스 지역을 정복했다. 1226년 몽팡시에 성에서 이질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루이 9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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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8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이 8세의 아비뇽 정복 (1226)
루이 8세의 아비뇽 공방전(1226년 6월 10일 ~ 9월 9일) 15세기 미니어처
별칭사자왕 (Le Lion)
프랑스어 별칭Le Lion
로마자 표기Le Lion
통치 정보
직위프랑스 국왕
재위 기간1223년 7월 14일 ~ 1226년 11월 8일
대관식1223년 8월 6일, 랭스 대성당
이전 통치자필리프 2세
다음 통치자루이 9세
잉글랜드 왕 재위 주장1216년 6월 2일 ~ 1217년 9월 20일
이전 통치자
다음 통치자헨리 3세
개인 정보
출생일1187년 9월 5일
출생지프랑스, 파리
사망일1226년 11월 8일 (39세)
사망지프랑스, 몽팡시에 성
매장지생드니 대성당
배우자블랑슈 드 카스티유, 1200년 5월 23일 결혼
자녀루이 9세
로베르 1세 다르투아
알퐁스 드 푸아티에
이사벨 드 프랑스
샤를 1세
가문
왕가카페가
아버지필리프 2세
어머니이자벨 드 에노

2. 왕자 시절

필립 2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이자벨 드 에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자벨은 서프랑크 왕가였던 카롤링거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기에, 카페 왕조와 카롤링거 가문의 두 혈통을 모두 이어받은 루이 8세의 탄생으로 프랑스 왕의 정통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여겨졌다.

1214년에는 기옌에서 침공해 프랑스를 협공하려던 잉글랜드 왕 존을 푸아티에에서 격퇴하여 남쪽의 근심을 덜었고, 북쪽에서는 부비뉴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다.

1216년 존에게 불만을 품은 잉글랜드 귀족들과 연합하여 잉글랜드에 침공했다(제1차 바론 전쟁). 한때 런던을 점령하고 즉위 직전까지 갔으나, 존이 급사한 후 뒤를 이은 헨리 3세가 대헌장을 승인하고 귀족들과 화해함에 따라 잉글랜드에서 철수해야 했다. 램베스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 반란군에 대한 사면, 루이가 다시는 잉글랜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서약, 그리고 루이에게 10000GBP 지급 등의 조건으로 평화가 맺어졌다.

1217년 잉글랜드에서 돌아온 후에는 남프랑스 귀족들의 반격에 고전하던 알비 십자군을 지원했다.

2. 1. 초기 생애

1187년 9월 5일, 루이는 프랑스필리프 2세와 에노 백작부인 이사벨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어머니는 1190년에 사망했지만, 루이는 아르투아 백작으로 정식으로 책봉되지 않았다.[2] 대신 그의 아버지는 루이가 통치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명목상으로 백작령을 통치할 수 있게 허락했다.[2] 1195년 여름, 필리프 2세리처드 1세 사이의 동맹을 위해 루이와 브르타뉴의 엘레오노르(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의 조카) 사이의 결혼이 제안되었으나 실패했다.

1200년 5월 23일, 루이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의 딸인 카스티야의 블랑슈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블랑슈의 삼촌인 잉글랜드의 존 국왕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협상 끝에 성사될 수 있었다.

루이는 필립 2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이자벨 드 에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자벨은 서프랑크 왕가였던 카롤링거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기에, 카페 왕조와 카롤링거 가문의 두 혈통을 모두 이어받은 루이 8세의 탄생으로 프랑스 왕의 정통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여겨졌다.

2. 2. 1214년 군사 작전

1213년 루이 8세는 플랑드르의 생토메르와 에르 두 도시를 점령했는데,[1] 이는 루이의 아버지 필리프 2세와 불로뉴 백작 레노 사이의 적대감으로 이어졌다.[1] 1214년,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의 존 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불로뉴 백작 레노,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낭으로 이루어진 동맹에 맞서 싸워야 했다.[2] 두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 상황에서, 플랑드르에서는 오토, 레노, 페르디낭이 솔즈베리 백작의 지원을 받아 남서쪽으로 진군하고, 푸아투에서는 존이 이끄는 군대가 파리 방향으로 북동쪽으로 진군하는 협공 작전이 계획되었다.

루이는 푸아투에서 존에 맞서는 전선을 지휘했다. 전투 초반은 잉글랜드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루이는 존의 책략에 밀려 6월 말 앙제를 잃었다. 존이 중요한 요새인 로슈오무아 성을 포위하자, 루이는 군대를 이끌고 존과 맞섰다. 그러나 현지 푸아투 귀족들은 루이의 군대에 합류하기를 거부했고, 불리한 상황에 놓인 존은 라로셸로 후퇴했다. 그 직후, 필리프는 북쪽에서 오토와 존의 다른 동맹군을 상대로 부비네 전투에서 격전 끝에 승리하여 존의 노르망디 탈환 희망을 꺾었다.

2. 3. 잉글랜드 왕위 주장

1215년, 잉글랜드 귀족들은 인기가 없던 국왕 존왕에 대항하여 제1차 귀족 반란을 일으켰다. 귀족들은 루이의 아내가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의 후손이라는 점을 들어 루이에게 왕위를 제안했다.[1] 루이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주장하기 위해 군대를 준비했다.

프랑스 루이 왕의 잉글랜드 도착 (『크로니카 마요라(Chronica Majora)』, 매슈 패리스(Matthew Paris), ~1259년)


1216년 5월 21일, 루이는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켄트 동부의 타넷 섬(Isle of Thanet)에 아무런 저항 없이 상륙했다. 왕자가 런던에 입성할 때 거의 저항이 없었고, 그는 런던 시민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올드 세인트 폴 대성당(Old St Paul's Cathedral)에서 잉글랜드의 루이 1세로 선포되면서 큰 웅장함과 축하 속에 즉위했다.[1] 그는 대관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많은 귀족들과 잉글랜드령을 대신하여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 of Scotland) 왕까지도 봉신(Homage (feudal))을 하러 모였다.[1]

1216년 6월 14일, 루이는 윈체스터(Winchester)를 점령했고, 곧 잉글랜드 왕국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1] 그러나 1216년 10월 존 왕이 죽자 많은 반란 귀족들이 존 왕의 아홉 살 된 아들 헨리 3세를 지지하기 위해 루이를 버렸다.[1]

1217년 5월 20일 링컨 전투(Battle of Lincoln (1217))에서 그의 군대가 패배하고, 1217년 8월 24일 샌드위치 전투(Battle of Sandwich (1217))에서 그의 해군이 패배한 후, 루이는 잉글랜드의 조건에 따라 평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1] 램베스 조약(Treaty of Lambeth)의 주요 조항은 잉글랜드 반란군에 대한 사면, 루이가 다시는 잉글랜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서약, 그리고 루이에게 지급될 10000GBP였다.[1] 그 대가로 루이의 파문이 해제되었다.[1]

2. 4. 알비 십자군 참전

1215년 4월, 루이 8세는 알비 십자군에 대한 아버지의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십자군에 참전했다. 나르보나에서 루이 8세는 시몽 드 몽포르와 아르노 아무리 사이의 불화에 대한 대응으로 도시의 요새를 파괴할 것을 명령했고, 자작과 다른 당국자들에게 시몽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했다.[1] 툴루즈에서는 도시 관리들에게 성벽을 허물고 해자를 메우며 시몽 드 몽포르를 그들의 정부 수장으로 받아들이도록 명령했다.[1] 루이 8세의 십자군 참여는 모든 면에서 시몽 드 몽포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1]

1224년 알비 십자군의 지도자였던 아모리 6세 드 몽포르로부터 남프랑스(랑그도크)의 지배권을 이양받자, 1225년 투루즈 백작 레이몽 7세를 다시 파문시키고, 1226년 새로운 십자군을 이끌고 랑그도크에서 오베르뉴, 그리고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영토였던 프로방스 정복에 나섰다.

전투에 지친 남프랑스의 여러 도시들은 거의 저항 없이 항복했고, 아비뇽에서 저항이 있었으나 3개월 만에 진압하여 남프랑스에 대한 왕권 확장에 성공했다. 그러나 11월 파리로 귀환하는 길, 오베르뉴의 몽팡시에 성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전장에서 감염된 이질로 추정되지만, 당시 왕비 블랑슈 드 카스티유와 샹파뉴 백작 티보 4세가 결탁하여 왕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3. 프랑스 왕으로서의 통치

루이 8세는 1223년 7월 14일 아버지 필리프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같은 해 8월 6일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1] 몽포르의 아마우리(Amalric of Montfort)는 왕국 컨스터블(Constable)이 되는 대가로 툴루즈 백작령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루이 8세에게 넘겼다.

1223년 랭스에서 루이 8세와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대관식, 《프랑스 대연대기》 미니어처, 1332년경~1350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


루이 8세는 왕이 된 후 1224년 5월 5일 잉글랜드 왕국과의 휴전을 갱신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앙주 가문의 영토를 공격하여 가스코뉴를 침략했고, 1224년 푸아투와 라 로셸, 생통주를 점령했다. 이를 위해 뤼지냥의 위그 10세와 협상하여 가스코뉴를 정복하면 보르도 시를 그에게 약속했다. 1224년 여름이 끝날 무렵 루이 8세는 리무쟁, 페리고르, 케르시를 정복했다. 1226년에는 랑그도크 원정을 통해 수많은 도시들을 함락시켰으나, 가스코뉴에서 그의 군사적 지원 부족은 뤼지냥의 위그 10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필리프 2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이자벨 드 에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루이 8세는 카페 왕조와 카롤링거 가문의 두 혈통을 모두 이어받아 프랑스 왕의 정통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여겨졌다.

1214년, 루이 8세는 기옌에서 침공해 프랑스를 협공하려던 잉글랜드 왕국 왕 존을 푸아티에에서 격퇴하여 남쪽의 근심을 덜었고, 북쪽에서는 부비뉴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다. 1216년에는 존에게 불만을 품은 잉글랜드 귀족들과 연합하여 잉글랜드에 침공하여(제1차 바론 전쟁) 런던을 점령하고 즉위 직전까지 갔으나, 존이 급사한 후 뒤를 이은 헨리 3세가 대헌장을 승인하고 귀족들과 화해함에 따라 잉글랜드에서 철수해야 했다.

1217년, 잉글랜드에서 돌아온 후에는 남프랑스 귀족들의 반격에 고전하던 알비 십자군을 지원했다.

3. 1. 즉위와 유대인 정책

1223년 필리프 2세가 사망하자 루이 8세는 즉위하여 유대인에게 돈을 빌리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발표했지만, 대귀족인 샹파뉴 백작 티보 4세는 이를 따르지 않고 대립했다.[1]

1223년 11월 1일, 루이 8세는 관리들이 유대인들에게 빚진 채무를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하여 그의 아버지 필리프 2세 오귀스트가 세운 정책을 뒤집었다.[2] 이로써 왕이나 귀족들로부터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지원도 사라지게 되었다.[2]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에게 빚진 돈 중 원금만 갚으면 되었다. 이 원금은 유대인에 대한 직접적인 권한을 가진 왕이나 다른 영주들에게 지불되었다. 이는 유대인 사채업자들에게 막대한 재정적 타격을 입혔고, 1225년 루이 8세는 롬바르드 사채업자들을 파리로 초청하게 되었다.

3. 2. 알비 십자군 원정

1223년, 루이 8세는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알비파에 대항하여 싸우라는 요청을 받았다. 1226년 초, 부르주 회의에서 툴루즈의 레이몽 7세가 파문당하고 다음 십자군을 위한 성직자 수입의 10분의 1을 약속하자, 루이 8세는 알비파에 대항하는 십자군에 참여할 의향을 밝히며 십자군 십자를 받았다.[1]

1226년 5월, 루이 8세는 부르주에서 군대를 집결시켜 베지에, 카르카손, 보케르, 마르세유를 점령했다.[2][1] 그러나 아비뇽은 프랑스군에게 성문을 열어주기를 거부하며 저항했다. 도시를 급습하기를 원하지 않던 루이 8세는 포위 공격을 시작했고, 8월에 있었던 정면 공격은 격렬하게 격퇴되었다. 1226년 9월 9일, 아비뇽은 6000마르크를 지불하고 인질을 넘겨주고 성벽을 파괴하는 데 동의하며 항복했다. 그러나 루이 8세의 군대는 아비뇽 포위 공격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1226년 10월, 툴루즈에 도착했을 때 그의 군대는 너무 지쳐 공격하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루이 8세는 다음 해에 툴루즈의 레이몽 7세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파리로 돌아갔다.

1219년 알비 십자군 전쟁 당시 미래의 루이 8세가 마르망드를 점령하는 모습. 윌리엄 오브 투델라와 익명의 계승자의 필사본, 《알비 십자군의 노래》(Song of the Albigensian Crusade), 잉크 드로잉, 프랑스, 13세기.


right

1224년 알비 십자군의 지도자였던 아모리 6세 드 몽포르로부터 남프랑스(랑그도크)의 지배권을 이양받은 루이 8세는, 1225년 투루즈 백작 레이몽 7세를 다시 파문시키고, 1226년 새로운 십자군을 이끌고 랑그도크, 오베르뉴, 그리고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영토였던 프로방스를 정복했다. 전투에 지친 남프랑스의 여러 도시들은 거의 저항 없이 항복했고, 아비뇽은 3개월 만에 함락되어 남프랑스에 대한 왕권 확장에 성공했다.

3. 3. 죽음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루이 8세는 이질에 걸려 1226년 11월 8일 오베르뉴의 몽팽시에 성에서 사망했다.[1] 생드니 대성당에는 루이 8세의 묘가 있다.[2] 그의 어린 아들 루이 9세(1214년 출생, 1226~1270년 재위)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했다.

사인은 전장에서 감염된 이질로 추정되지만, 당시 왕비 블랑슈 드 카스티유와 샹파뉴 백작 티보 4세가 결탁하여 왕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4. 가족

루이 8세는 1200년 5월 23일에 카스티야의 블랑슈와 결혼했다. 블랑슈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의 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태어났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블랑슈1205년1206년
아녜스1207년
필리프1209년 9월 9일1218년 6월 30일1215년 7월 돈지의 아녜스와 약혼[1]
알퐁스1213년 1월 26일출생 직후잔의 쌍둥이 형제[2]
1213년 1월 26일출생 직후알퐁스의 쌍둥이 동생
루이푸아시, 1214년 4월 25일1270년 8월 25일, 튀니스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됨
로베르1216년 9월 25일1250년 2월 9일, 만수라 (이집트) 전투 중 사망아르투아 백작
잔 트리스탕1219년 7월 21일1232년앙주와 망주 백작, 1227년 3월 브르타뉴의 요란드와 약혼
알퐁스푸아시, 1220년 11월 11일1271년 8월 21일, 코르네토푸아투오베르뉴 백작, 결혼을 통해 툴루즈 백작
필리프 다고베르1222년 2월 20일1232년
이자벨1225년 3월 16일1270년 2월 23일
스테판1225년 12월 31일1227년 3월 21일
샤를1227년 3월 21일 (사후)1285년 1월 7일앙주 카페가의 시조, 시칠리아 왕국의 왕, 앙주와 망주 백작, 결혼을 통해 프로방스와 포르칼키에 백작


5. 유산

루이 8세는 가스코뉴와 랑그도크 대부분을 프랑스 왕실의 지배하에 남겨두었다.[1] 유대인 금융업자들에게서 받은 대출금을 그들 위에 권한을 가진 영주들에게 돌린 그의 결정은 파리의 재정 위기를 초래했고, 이는 롬바르드 금융업자들을 파리에 들여옴으로써 막을 수 있었다.[2] 1226년에 시작된 루이 8세의 알비파(카타르파)에 대한 십자군 원정은 베지에, 카르카손, 보케르, 마르세유를 함락하는 등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비뇽에서의 값비싼 승리는 그의 군대가 툴루즈를 함락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아내인 카스티야의 블랑슈는 십자군 원정을 계속하여 툴루즈 백작 레이몽 7세가 파리 조약에 서명하게 했고, 루이 8세의 아들 알퐁스가 사망한 1271년에 왕실은 툴루즈 백작령을 얻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Louis VIII le Lion Fayard 1995
[2] 웹사이트 Louis VIII king of France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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